가야의 대표 유적
우리가 많이 들어 왔던 '금관 가야'가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官은 사전적 의미로 벼슬, 관청, 임금으로 되어 있지만 한자의 어원을 살펴보면 진짜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官자는 宀(집 면)자와 阜(언덕 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阜자는 흙이 쌓여있는 ‘언덕’이나 ‘구릉’을 그린 것이다."
흙이 쌓여 있는 언덕을 官이라고 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유물이 하나 있습니다.
금관을 해석하면 '김씨네 언덕 집' 혹은 '금을 묻은 언덕집'이 될 것입니다.
무덤이 왜 집이냐고요?
고대에는 사람들이 사는 집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묻이는 집을 음택이라고 했어요.
집이 맞습니다.
가야는 42년에 독립하여 532년까지 경상도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6세기 초까지 경상도의 유물은 가야의 것이고, 이후는 신라의 것과 섞이게 됩니다.
유적을 통해 검증을 해 보겠습니다.
6세기 초반에 무덤 양식이 돌무지 덧널 무덤에서 돌방 무덤으로 확 바뀝니다.
그래서 돌무지는 가야, 돌방은 신라, 백제 (고구려는 아직 모름)의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요,
돌무지가 가야의 것이면 아래 그림과 같은 세계적 유물이 가야에 귀속됩니다.
신라 금관이 나온 고분이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입니다.
황남대총은 4세기 고분이니 가야의 것이구요.
나머지 고분들은 모두 돌무지에 해당합니다.
금을 묻은 언덕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 귀한 금을 묻고 장례를 치뤘다고?!!!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 싸우느라 금관과 같은 최고의 사치품을 만들 여력이 없었습니다.
반면 가야는 초기에는 신라와 마찰이 있었지만 거의 300년이상 전쟁없는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습니다.
또한 인도는 물론 왜등과도 활발한 교역을 했습니다.
평화롭고 교역이 활발했다면 당연히 경제도 부강했을 것입니다.
덕분에 가야 후반부에는 금관까지 만들어 묻는 사치스런 문화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라가 가야를 꿀꺽 삼키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