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 이해하기(1) - 임나일본부 논파
(1) 포상팔국의 난
백제 초고왕(166년~214년)이 집권하던 209년, 포상팔국의 난이 발생한다.
포상팔국의 난은 8국이 가라를 공격하자 가라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신라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 석우로 등이 8국을 물리치고 가라를 구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해지고 있는 포상팔국의 이름은 아래과 같다.
* 삼국사기 - 고사포국(古史浦國), 사물국(史勿國), 칠포국(柒浦國), 골포국(骨浦國)
* 삼국유사 - 사물국(史勿國), 고자국(古自國), 보라국(保羅國)
이들 지역의 위치는 아래 그림에 표시하였다.
고사포국과 보라국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칠포국 - 옻칠로 유명한 곳이다. (북한 태천 지역이 옻으로 NO1이다)
고자국의 自의 한자의 뜻은 코를 의미한다. (해안선의 모양이 코처럼 생겼다)
사물국의 勿은 옹진반도의 해안선의 형태와 비슷하다.
초고왕의 肖를 통해서도 포상팔국의 위치를 유추해 낼 수 있다.
肖는 小와 月이 결합된 글자이다.
* 小의 의미는 쪼개지다
* 月은 달처럼 생긴 지역.
즉, 초고왕은 백제의 영역이었던 月지역이 쪼개졌다는 뜻을 내포하다고 있다.
백제에서 떨어져 나간 곳은 가라 지역이다.
가라가 신라로 넘어가면서 백제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라를 되찾기 위해 백제는 계속 전쟁을 벌였지만 구수왕은 연전 연패를 하고 만다.
백제가 가라 지역을 퇴찾은 것은 고이왕때이다.
(2) 기리영 전투
238년에 위나라의 사마의가 4만의 군대로 공손연을 정벌한다.
242년에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자 위나라는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관구검에게 비류수에서 고구려군 3천을 잃었고, 양맥곡에서는 1만 8천을 잃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간다.
현도 태수 왕기(王頎)가 부여의 위거왕으로부터 군량을 받았고, 동천왕을 북옥저까지 추격한다.
동천왕은 평양성에서 방어진을 갖춘다.
246년 위나라는 대방 기리영에서 백제와 전투를 벌인다.
이때 백제왕은 고이왕이다.
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부종사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잘못 통역하면서 신지(臣智)가 격하고 한(韓)이 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켰고, 준은 전사한 이후에 두 군에서 한이 사라졌다.
부종사 오림(吳林)의 말을 이해하려면 어떤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1. 신라는 본래 낙랑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이므로 신라는 낙랑에 속하는 나라다.
2. 진한 8국은 포상팔국이다.
포상팔국은 신라에게 패했기 때문에 위나라는 그들을 신라에 밑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포상팔국은 백제에게 속해 있었다.
3. 신라가 낙랑 출신이니 신라의 속해 있는 포상팔국(=진한8국)도 낙랑에 속해야 한다.
4. 그래서 백제가 분해서 대방의 기리영을 공격한 것이다.
帶方太守 弓遵에서 弓은 실제 사람 이름이 아니라 한반도 서해안 해안선의 형태를 나타낸 것이다.
대방태수의 이름은 왕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대방 태수가 아닌 삭방 태수(朔方大守)라고 되어 있다.
朔은 月을 나타내는 한자로 포상팔국 지역을 의미한다.
즉, 대방태수, 삭방태수는 포상팔국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왕준이 죽자 백제가 전쟁을 끝내고 대방과 낙랑에서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다.
* 二郡遂滅韓 한이 멸망했다가 아니라 군대를 퇴각시켜 사라졌다는 관용적 표현이다.
(3) 가나 지역 회복 - 임나 일본부의 진실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석우로는 신라의 대장군으로 포상팔국 전쟁의 영웅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진구왕후(170년~ 269년) 시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고이왕은 가라를 되찾기 위해 왜를 신라와의 전쟁에 끌어들인 것 같다.
백제와 왜 연합군은 탁순에 모여 신라와 전투를 벌였고, 신라군을 이끌고 있던 석우로를 죽이게 된다.
당시 탁순은 가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는데 신라가 패배하면서 가라는 고립이 된다.
결국 가라는 신라를 버리고 다시 백제편에 서게 되면서 포상팔국의 난 이후 혼란했던 지역이 안정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신라를 격파하면서 비자*, 탁순, 다라, 훼국, 안라, 남가라 지역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참고로, 백제와 왜 연합군이 비자 탁순 다라 훼국 안라 남가라등을 공격하여 땅을 점령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동안 국경 분쟁 지역이 안정을 찾았다는 말이다.
* 仍移兵西廻至古爰津
탁순에서 승리한 후 군사를 돌려 신라가 아닌 가라의 고해진으로 갔다는 의미이다.
*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백제의 왕 초고와 그의 왕자 귀수의 영정 앞에 원수 석우로(남만)의 목을 바쳐 제사를 올리며(침미다례) 넑을 위로했다.
참고로, 249년은 초고왕과 구수왕 모두 사망한 상태이므로 영정이라고 의역을 하였다.
진구왕후의 연대는 2세기 ~ 3세기 경이다.
삼국사기 일본서기를 보면 이 시기에 왜가 신라와의 전투에 참여한 것은 맞다.
전투는 탁순에서 벌어진 신라와의 전투가 전부이다.
왜는 많은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7국을 각개 격파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포상팔국에 가라는 포함되지 않는다.
가라는 초고왕때 신라에게 넘어갔고 이후 백제에게 들어갔다는 기록이 없다.
진한 8국은 포상팔국이다. (추정)
진한 8국은 백제와 함께 위나라의 대방군 기리영에서 전쟁을 했다. 고로 백제의 속한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7국은 칠포국 지역을 제외한 포상팔국의 위치와 동일하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면 왜가 한반도 땅을 지배했다는 근거가 없다.
다만 왜는 참전 댓가로 백제와 교역하고,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통행권 정도를 얻었던 것으로 보이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교는 근초고왕때이다.